<이원호의 경제톡> “모든 것을 바꾸라”던 삼성, 왜 HBM 전쟁선 밀렸나

HBM 등장 초기 연구조직 해체하고 수익성 높은 D램에 집중
의사결정 구조 중앙집중, 위계적인 형태 유지해 변화에 둔감
삼성에 절신한 것은 성공 가능케 했던 ‘변화의 철학’ 현실화  
빅터뉴스 2025-07-14 15:49:40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당시 삼성그룹 회장이었던 고(故) 이건희 회장이 임직원들에게 던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라는 한 마디는 한국 산업사에 길이 남을 선언이었다. 이 말은 단순한 수사(修辭)에 그치지 않았다. 제품 품질 개선, 디자인 혁신, 해외시장 개척, 기술 내재화에 이르기까지 ‘변화’에 중심을 둔 강력한 메시지였다. 그 결과 삼성은 가전 중심의 기업 구조를 반도체, 디스플레이, 휴대폰 등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에 성공하며, 세계를 선도하는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초격차’라는 상징 아래 세계를 주도하던 삼성전자는 AI 반도체 전환의 시대적 흐름 앞에서 기대 이하의 대응을 보이고 있다. 특히 고대역폭 메모리(HBM) 분야에서는 SK하이닉스에 기술·시장 양면에서 주도권을 내주고 있는 실정이다. 이 상황은 단순한 기업 간 일시적 격차에 그치지 않는다. 변화를 바라보는 두 기업의 철학 차이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HBM은 기존 D램 대비 수십 배 빠른 전송속도로 AI 반도체와 고성능 컴퓨팅(HPC), 클라우드 데이터센터의 핵심 부품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생성형 AI의 확산으로 인해 HBM은 ‘연산의 심장’이자, 미래 메모리 기술의 바로미터가 되었다. 여기서 SK하이닉스는 선제적이고 과감한 선택을 했다. HBM2부터 HBM3, 최근에는 HBM3E에 이르기까지 빠르게 기술 개발과 생산 체제를 갖추며, 엔비디아와 AMD 등 글로벌 AI 반도체 기업에 안정적으로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2025년 1분기 기준 SK하이닉스의 HBM 시장 점유율은 약 70%에 달한다.

반면 삼성전자는 HBM 시장에서 뚜렷한 기술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HBM3E 제품이 아직 엔비디아의 공식 품질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상태다. 삼성의 HBM3E는 열처리와 전력 관리 이슈 등의 문제가 발생했고, 공급 승인은 2025년 4분기로 미뤄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삼성의 2025년 1분기 HBM 시장 점유율은 약 25% 수준으로, SK하이닉스와의 격차는 기술뿐 아니라 시장 신뢰도 측면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더욱이 하이닉스가 엔비디아의 ‘주력 공급사’로 자리매김해 삼성은 후발주자의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D램과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절대 강자로 군림해온 삼성이 HBM 경쟁에서는 후발주자로 전락한 것은 단순히 기술 개발 속도가 느려서가 아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기득권의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다. 삼성은 오랫동안 D램 분야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이 같은 강점은 오히려 AI 시대의 급격한 변화에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실제로 HBM이 처음 시장에 등장했을 때, SK하이닉스는 AMD와의 협업을 통해 과감히 투자에 나섰지만, 삼성은 2019년 HBM 전담 연구조직을 해체하며 수익성 높은 D램에 집중했다.

결국 문제는 삼성전자가 과거처럼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때로는 기존 사업 구조를 통째로 흔들면서까지 미래를 준비하는 방식이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휴대폰 등 핵심 사업에 있어 과감한 투자와 조직 혁신을 동반하며 세계 시장의 패러다임을 이끌어갔다. 하지만 현재 삼성의 경영 전략은 과거의 유산을 지키는 데 초점을 맞춰져 있으며, 새로운 흐름을 선도하는 데 필요한 ‘불확실성에 대한 도전’이 결여된 듯하다.

삼성의 의사결정 구조는 중앙집중적이고 위계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각 사업부는 단기 실적 관리에 몰두하며 장기적인 기술 패러다임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 반면 SK하이닉스는 조직 유연성과 기술 중심의 문화, 글로벌 고객사와의 긴밀한 파트너십을 통해 시장의 흐름을 선제적으로 감지하고, 전략을 과감하게 전환했다. 이를 통해 HBM이라는 새로운 시장에 선택과 집중해 ‘AI 메모리 표준’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두 기업 간의 철학과 조직문화의 차이가 기술 격차 이상의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
이원호 박사


물론 삼성전자는 여전히 막강한 생산 인프라, 자본력, 글로벌 브랜드를 바탕으로 메모리 산업의 핵심 축으로 남아 있다. HBM4, CXL, 차세대 패키징 기술 등에 대한 투자도 확대하고 있으며, 회복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기술만으로는 시장의 신뢰를 되찾기 어렵다. 과거 ‘초격차’라는 표현이 통했듯, 지금 삼성에 필요한 것은 성공 경험을 되새기는 것이 아니라, 그 성공을 가능하게 했던 ‘변화의 철학’을 다시 현실화하는 일이다. 

이건희 회장이 외쳤던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선언이, 오늘날 AI 반도체 시대를 앞두고 다시 한 번 삼성의 DNA에 되살아나야 할 시점이다.

이원호 비즈빅데이터연구소장(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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