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호 경제톡> 관세 장벽 넘어선 K-수출의 힘
2025-10-20
자동차가 더 이상 기계가 아니라 소프트웨어 플랫폼으로 인식되는 순간, 생산 방식·고용 구조·부품 체계 모두가 재구성된다. 자동차는 달리는 스마트 디바이스가 되고, 제조업의 경쟁력은 쇳덩이의 품질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좌우한다. 이에 각국 정부와 글로벌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미래의 기술 및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는 등 속도전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속도 경쟁에 취해 방향을 놓쳐서는 안 된다.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주요국은 이미 전환의 속도를 조절하며 산업 기반을 지키는 쪽을 택하고 있다. 미국은 IRA 보조금과 관세정책으로 자국 생산을 유도하되, 하이브리드·수소차·e-fuel 등 다양한 기술 경로를 열어두었다. 유럽연합 역시 2035년 내연기관 판매 금지 방침을 유지하면서도 탄소중립연료를 병행 허용했고, 일본은 하이브리드 강점을 활용해 내연기관 고효율화와 수소연료 병행전략으로 완급을 조절하고 있다.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산업의 지속 가능성’을 전제하지 않는 속도전은 오히려 위험하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우리 산업의 현실은 이상과 괴리가 크다. 많은 기업이 “미래차로의 전환이 다가오고 있지만 준비할 시간이 없다”고 토로한다. 최근 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와 자동차산업협동조합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는 기업의 대부분은 중소·중견 규모로, 절반 이상이 여전히 내연기관 부품에 의존하고 있다. 미래차 관련 매출 비중이 30%를 넘는 기업은 10곳 중 1곳도 되지 않으며, 연구개발 인력이 50명 미만인 기업이 80%에 이른다. 2024년 전체 부품기업 매출은 전년보다 30% 이상 줄었고, 미래차 매출은 전체의 0.4%에 그친다.
이들은 미래차 기술 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투자 여력이 없다. 연구개발비는 매출의 1%도 안 된다. 대다수 자동차 부품업체들은 미래차 준비를 위한 예산조차 확보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토로한다. 52시간 근로제의 제약과 인력 확보의 어려움, 원자재 가격 상승, 미국의 25% 관세 등도 향후 경영 환경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자동차 산업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이들의 현실은 ‘혁신’보다는 ‘버티기’가 더 절실한 상태다.
그런 가운데 정부가 2035년까지 약 840만~980만 대를 무공해차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검토하면서 자동차 부품업계는 위기감을 표출하고 있다. 정부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2034년부터는 신차의 90~100%를 전기나 수소차로 팔려야 한다. 그러나 내연기관 중심으로 구성된 우리 산업의 구조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수치다.
독일과 일본에서는 급격한 전환으로 수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자 전동화에 대한 속도 조절론이 대두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부품산업 종사자만 무려 11만 명에 달한다. 이들이 한순간에 전기차 부품으로 전환할 수는 없다.
이에 관련업계는 전기·수소차 중심의 일방적 감축 대신 하이브리드(HEV),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등의 생산과 당분간 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연기관의 기술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탄소중립연료를 활용하거나 고효율 엔진으로 개조하는 방식으로 산업 공백을 최소화한다는 것이다. 독일과 일본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미국도 유연한 접근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하다.
현재 자동차 산업은 기회와 위기가 공존한다. 전기차·자율주행 시장은 새로운 성장 동력이지만, 준비되지 않은 전환은 산업 공동화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노동 유연성이 낮고 규제가 많은 산업 구조 속에서 속도만 앞세운 정책은 기존 부품업계의 고용 기반을 흔드는 위험을 내포한다. 전환은 속도가 아니라 지속가능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탄소중립의 목표는 중요하지만, 산업이 존재해야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술 혁신과 산업 생태계의 안정이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정책의 무게중심을 옮겨야 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생태계의 내구성이다. 미래차 전환 경쟁은 가장 오래 버티는 국가가 이긴다. 따라서 산업정책의 초점은 ‘얼마나 빨리’가 아니라 ‘얼마나 견고하게’가 되어야 한다. 미래차 전환은 자동차 산업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100년을 여는 시작점이다. 정부와 산업계가 조급함을 내려놓고, 산업 기반을 지키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균형 전략을 세울 때 비로소 한국 자동차 산업은 미래차 시대의 주역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원호 비즈빅데이터연구소장(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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