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호의 경제톡>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부활할 수 있을까

1980년대 압도적 반도체 1위 일본…변화 대처하지 못해 몰락
日정부, ‘칩 4동맹’ 활용해 반도체 부활 꿈꾸지만 쉽지 않아
韓, 일본 정책 실패와 ‘기술 갈라파고스화’ 반면교사로 삼아야
2022-12-19 12:13:34

1980년대 말 일본은 반도체 최강국이었다. 1988년 세계 반도체 시장은 일본과 미국이 양분하고 있었는데, 국가별·지역별 매출 비중을 보면 일본이 50.3%로 압도적인 1위다. 그 다음 미국이 36.8%로 2위인데 일본과 차이가 컸다. 한국과 같은 아시아 지역은 3.3%에 불과했다. 당시 세계 10대 반도체 기업의 판도도 일본 기업이 6개(NEC, 도시바, 히타치, 후지츠, 미쓰비시, 마쓰시다), 미국 기업이 3개(인텔, 모토롤라, TI),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유럽 기업인 필립스가 차지하고 있었다. 일본 전기·전자 제품이 세계 시장을 제패하고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하지만 현재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글로벌 시장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수준으로 추락했다. 2020년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미국이 55%로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그 다음으로 아시아 지역이 33%로 2위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나머지는 일본과 유럽이 각각 6%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30년간 반도체 산업의 변화 추이는 ‘미국-약진, 아시아 지역-급속 성장, 일본-몰락, 유럽-현상 유지’로 요약된다, 일본 입장에서 보면 그동안 뺏긴 시장 점유율 약 45% 중에서 30% 정도는 한국, 대만, 중국 등 주변 국가로, 그리고 나머지 15%는 미국으로 이동한 것으로 파악된다.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몰락하면서 기업들도 글로벌 순위에서 자취를 감췄다. 2021년 기준 세계 10대 반도체 기업 순위를 보면 일본 기업을 찾아볼 수 없다. 미국은 1위인 인텔을 포함한 6개 기업, 한국은 2개 기업(삼성, SK하이닉스), 대만은 TSMC 등 2개 기업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일본 반도체 기업의 마지막 자존심이라는 키오시아(Kioxia)가 몇 년 전까지 8~9위권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2021년에는 12위로 떨어졌다. 30여년 만에 쟁쟁한 일본의 반도체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 순위에서 밀려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앞으로 더 안 좋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일본 닛케이 신문(日?新聞)이 일본 경제산업성의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기사를 보면 2030년에 일본 반도체 기업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0%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전망은 그동안 일본 기업의 시장 점유율의 하향 추세가 미래에도 계속된다는 가정 하에 만들어진 수치이기 때문에 논리적인 분석은 아니다. 하지만 그만큼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총체적인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첫 번째 원인은 1985년 체결된 플라자 합의에서 찾을 수 있다. 달러 당 240엔이었던 엔/달러 환율은 1987년 120엔까지 수직 하락했다. 엔화 강세의 여파로 일본산 반도체 제품의 수출경쟁력이 크게 하락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미국 제품에 밀리기 시작했고, 한국과 대만 등의 저가 공세에 직면하면서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플라자 합의 7년 후인 1992년에 삼성전자가 D램 부문 세계 1위에 올라섰고, 2001년에는 일본 반도체 기업의 대표 격인 NEC와 도시바가 D램 사업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점을 꼽고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 내놓은 반도체 산업 몰락의 원인을 ▲미·일 무역마찰에서 메모리 패전 ▲설계와 제조의 수평 분리에 실패 ▲디지털 산업화 지체 ▲일본 자급자족주의의 함정 ▲일본 기업의 투자 축소와 한국, 대만, 중국의 국가적 차원에서의 지원 등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들 원인을 요약하면 한ㄸ 세계 1위였던 일본 반도체 산업은 글로벌 흐름을 외면한 정부의 정책 실패와 관료화된 기업의 ‘기술 갈라파고스화’의 합작품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최근 들어 일본 정부는 반도체 산업을 부활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일본 정부는 국내 대책과 국제 전략으로 나누어 내놓고 있는데, 먼저 국내 대책은 소재 산업의 강점, 지정학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해외 파운드리 업체와 공동 개발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이는 세계 최대의 파운드리 업체인 TSMC가 28~22 나노 기술 공정을 적용하는 생산 시설을 일본 구마모토에 유치하는 것으로 결실을 맺고 있다. 일본 정부는 총 투자액 70억 달러의 약 절반을 보조금으로 지급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다음으로 국제 전략은 미국 주도의 ‘칩4 동맹’을 활용하는 우호국과의 제휴가 주를 이루고 있다. 실제로 일본은 미국, 대만 등과 손잡고 반도체 연합 전선을 구축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애플과 소니가 협업체계를 강화하고 있으며, 일본이 지난달 차세대 반도체를 직접 개발하기 위해 8개 대기업이 공동 출자해 설립한 래피더스도 미국의 IBM과 손잡고 2나노 공정 개발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반도체 산업이 부활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일본이 반도체 장비·설비 및 시스템 반도체 등 기초 분야에 강점을 지니고 있어 성공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최첨단 반도체 분야에서는 한국과 미국, 대만 등에 10년 정도 뒤처져 있어 따라 잡기 쉽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최근 일본 정부가 발표한 반도체 산업 부활의 키워드가 일본(기업) 자체의 실력보다는 미국이나 대만 등 외부의 지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 성공 가능성에 의문을 표시한다.

한편 미국과 일본, 대만이 손잡고 반도체 연합 전선을 단단하게 구축해 나가면서 국내 반도체 업계는 글로벌 합종연횡에서 다소 겉돌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자칫 고립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1980년대 말 반도체 강국이었던 일본이 정책 실패 및 ‘기술 갈라파고스화’를 지향하다가 몰락한 사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때이다.

이원호 비즈빅데이터연구소장(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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